[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16) ​​​​​​​공산권 연구에서 얻은 결론, 김정은 공산정권 필망론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16) ​​​​​​​공산권 연구에서 얻은 결론, 김정은 공산정권 필망론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5.0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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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이번 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여러 명사들과의 인연을 서술했다.

특히, 고충석 총장의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접촉'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고 총장의 인생은 60년생 이후 겪어보지 못했던 시절을 음미해 보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 총장이 걸어온 길이 굉장히 흥미롭고 제주의 섬소년이 어떻게 총장까지 올라갔는지 그의 행보를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이번 제2장 '사회로 나아가다', '공산권 연구에서 얻은 결론, 김정은 공산정권 필망론'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이 글을 통해 고 총장은 북한은 망하는 시기가 문제이지 반드시 그 길로 갈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공산당 간부들의 이익 동맹체제인 중국의 앞날도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을 밝혔다. 시민사회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고 공산당 이너서클(inner circle)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중국은 예측불허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정권담당자들은 국민의 합의를 기반으로 통일 대비 재원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만시지탄은 있지만 착실히 통일준비를 해야 한다"며 "어쩌면 남.북한 통일은 도둑처럼 찾아올른지 모른다"고 조언했다.

고 총장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던 유고슬라비아 자치 관리 사회주의는 젊었던 시대의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해서 창안된 된 제도다.

문제는 그 사회제도가 사상의 지향대로 실제로 잘 작동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한 논점으로 이러한 점을 고찰한 것이 고 총장의 논문 핵심이었다. 이 방면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은 한국에서는 고 총장이 처음이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제16장

공산권 연구에서 얻은 결론, 김정은 공산정권 필망론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정치학계에서 통용됐던 공산주의 변화 모델로 보면 지금의 김정은 정권은 결국,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 모텔로 가든지 아니면 호네커의 구 동독모델을 경유해서 남에 흡수되든가 할 것이다.

어떻든 남한 중심으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역사의 필연이고 인과율이 작용한 결과다.

어떤 길로 가든 그 과정이 상당한 기간을 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최근 미국에서 출판된 ‘Why Nations Fail'이란 책은 북한의 실패 원인을 ’착취적 제도’에서 찾는다.

공저자인 아세 모굴로(D.Acemoglu) MIT 교수와 제임슨 로빈슨(James Robinson) 하버드대 교수는 ’포용적 제도’를 성공과 번영의 열쇠로 간주한다. 실패국가의 전형은 북한이고 포용적 제도를 통해서 그간 괄목할 만한 번영을 견인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북한은 망하는 시기가 문제이지 반드시 그 길로 갈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당 간부들의 이익 동맹체제인 중국의 앞날도 나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시민사회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고 공산당 이너서클(inner circle)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중국은 예측불허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할 것이다.

우리나라 정권담당자들은 국민의 합의를 기반으로 통일 대비 재원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만시지탄은 있지만 착실히 통일준비를 해야 한다. 어쩌면 남.북한 통일은 도둑처럼 찾아올른지 모른다.

남북이 통일되면 인구 규모, 가장 낮은 문맹률, 근면하고 머리 좋은 북한의 노동력과 지하자원 등을 기반으로 지금 보다 훨씬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영국 수준으로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통일해야 하는 이유이고 비젼이라고 생각한다.

‘Foreign Policy’라는 잡지가 있다. 외교관들이나 외교정치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만든 잡지이다. 몇 년 전에 이 잡지에 실렸던 내용인데 2050년경에 세계를 이끌 네 나라를 선정하여 언급하고 있다. 네 나라의 국가명의 앞 글자를 따서 GUST라 하였다.

Germany의 G, USA의 U, Turkey의 T, South Korea의 S이다. 이들을 합하여 GUST라 하였다. 2050년이면 앞으로 30년도 남지 않은 가까운 미래이다. 나야 그때까지 살수야 없겠지만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잡지에서 한국의 미래를 그렇게 낙관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 낙관적인 미래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통일이 필수요건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통일 없이는 그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라는 말처럼 통일을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 그 과제가 최고의 국정과제 목록에 속해야 한다.

내가 공부핶던 아카데미 과정은 강인덕 소장이 정부를 떠나자 자동 소멸하였다.

원래 2년이었던 과정이 1년 반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에는 훗날 대학교수, 공무원이 된 사람도 있다. 또 사업가로, 은행원으로 자리잡은 이도 여럿 있다.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행방이 묘연한 사람, 요절한 사람, 로비스트로 활동하다가 옥살이를 한 사람, 그 삶이 천차만별이다.

쿠바(Cuba)의 공산화 성공 요인을 분석한 수료논문을 제출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사실은 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에 근무하면서 그 과정을 다녔기 때문에 돌아오고 말고도 없었다. 그때가 78년 말쯤이었을 것이다.

‘사회과학 연구소’ 근무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가기 위해서는 경력관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되었다. 만시지탄은 있지만 모교의 행정학과 박사과정에도 입학했다.

다행히 입학 영어성적이 괜찮았던지 앞으로 치를 박사종합시험에서 봐야될 영어시험 과목이 면제되었다.. 영어시험 면제로 종합시험 부담이 한층 줄어들었다. 79년부터 서울 소재 대학에 출강도 하기 시작했다.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79년 여름에 잠시 고향에 들렀다. 제주대학교 고성준 교수 방을 방문했다. 교수 두 분이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방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고 교수의 생활이 매우 안정된 분위기였다. 그전까지는 대학교수를 크게 선망해 본 적은 없었다.

어깨너머로 교수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고 교수가 무척이나 부러워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세월을 방황했던 삶의 파고가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실 중학교 1학년 마치고 시작된 객지 생활, 그 자체도 하나의 유랑이 아니었던가. 아무나 그리스 작가 키잔차키스(Nikos Kazantzakis)rk 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인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런 그릇도 못된다. 나는 이미 안정추구의 소시민이 되고 싶은 욕구가 무의식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나도 이제 정착하고 싶었다.

시인 류시화는 노래했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라고.

나에게는 들녘도 집도 아무것도 없다. 연구원이든 교수든 뭐든 자리를 알아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큰 문제였다. 모래를 씹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박사가 매우 귀할 때라 박사학위가 없어도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능하면 서울 등 육지 소재 대학에서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고향에서 산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매우 불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몰락한 가세를 생각하니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귀양살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귀양은 귀향에서 유래한 말로 고려 시대의 형벌 중 하나였다. 관리의 지위와 특권을 박탈하여 본관(本貫)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였다. 귀향이 형벌로서 성립된 배경은 고려 전기에 왕도(王道)에 모여 국가로부터 토지수익의 분배를 받아 생활하고 있던 관리들에게 귀향은 생활수단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란즈 파농(Frantz Omar Fanon)식으로 말하면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바와 진배 없다고나 할까 그런 것이다. 오늘날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멋진 회귀(回歸)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형벌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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