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국 시인의 시인선](4)강철 같은 무지개 이육사
[이희국 시인의 시인선](4)강철 같은 무지개 이육사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5.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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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강철 같은 무지개 이육사

조국 광복에 대한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애국시인이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가족구성원 대부분이 독립투사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 한시도 비굴하게 숨지 않고 정면으로 항거하다가 23세인 1927년 첫 수감을 시작으로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베이징 감옥에서 39세의 나이로 순국하는 순간까지 무려 17회나 투옥되었다.

그는 시인임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애국자이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대표적 실천문학인이며 쉼 없는 열정으로 독립된 조국을 그려내던 강철 같은 무지개였다.

1.  탄생과 성장

이육사 시인은 1904년 5월18일(음력 4월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아버지 이가호(퇴계 이황의 13대손)와 어머니 허길(의병장 허형의 딸)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본명은 이원록李源錄, 이명은 이원삼李源三이다.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문학을 수학했으며 조부가 교장이었던 보문의숙(뒤에 도산공립보통학교)을 졸업한 후, 16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17세에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 후 대구 교남학교(현재 대륜 고등학교)에서 수학한다. 친가와 외가 쪽 모두 엄숙하고도 애국적인 가풍 속에 성장한 시인은 졸업 후 19살 때인 1923년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킨죠’예비학원을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한 후,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 상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 재학 중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백형 원기와 숫제 원일과 함께 가입한 후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무대로 항일활동을 벌이기 위해 중퇴한다. 1926년 잠시 귀국해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애국지사들과 신문화강좌를 연 것이 공식적인 구국활동의 시작이며, 이듬해 봄 이정기와 함께 베이징에 가서 지사들과 독립운동과 자금모집방법에 대해 협의하고 돌아온다.

1927년 형 이원기와 두 명의 동생(이원일, 이원조) 등 4형제가 함께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류 되어 함께 수감되었으며 시인은 3년형을 받게 된다.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기, 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 거꾸로 매단 채 고춧가루 탄 물 붓기 및 쉼 업는 구타 등 온갖 고문을 수시로 당했지만 시인은 언제나 꼿꼿하였다. 1929년 장진홍 의사의 검거로 2년 6개월 만에 풀려난 이육사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한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난다.

1931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년 3월 퇴사하였고,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의 핵심인원인 윤세주를 만나 가입하였다. 1932년 이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조선군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 후 졸업에 이른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과 폭약, 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 변장법, 무기운반법 등을 배웠고, 특히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상하이를 거쳐 신의주로 입국한 그는 1934년 ‘조선군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 때 다시 투옥되어 7개월 만에 풀려난다. 구국을 향한 시인의 일념은 일제의 모진 탄압과 감시에도 쉬지 않았다.

1936년 다시 검거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는 등에도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다가 1943년 모친 초상으로 귀국 후 체포되어 이듬해인 1944년 1월 16일 아침 5시 순국하기까지 17회의 체포와 온갖 고문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의 시 「절정」에 나오는 강철 같은 무지개의 삶이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절정」 전문

2. 작품 활동과 생애

1929년 형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그는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였고 『문예운동』창간지에 「전시」를 발표한 이후,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시인은 1930년 베이징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학문과 독립운동 활동을 겸하게 된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과 교류하며 문학적 자극을 얻어 국내의 『대중공론』에도 시를 보내 게재한다.

이 시절, 훗날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게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을 설립하는 데까지 영향을 주었다 한다.

수차의 고문 후유증으로 각종 병에 시달리던 무렵에도 육사는, 행동할 수 없다면 글로서라도 항일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본격적인 창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4년부터 각종 언론계에 기자로 종사하며 다양한 평론과 시조 및 번역과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나타내었고 1937년 신석초, 김광균, 윤곤강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내며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치열한 정치활동이나 지난한 항일투쟁 속에서도 그의 시는 소망이나 신념은 호소하되 직설적이나 선동적 구호는 찾아보지 못한다.

전통적이고 목가적인 어조와 더러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징과 은유가 그의 시를 이끈다. 맑고 깨끗하며 반듯함에 정통 선비의 품격까지 갖춘 그는 베이징 유학시절에 접한 중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지사적인 품위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시풍에 대해 혹자는 유교적 선비정신을 벗어나지 못한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시라는 비판도 하지만, 도리어 ‘직설적 저항 시’들이 빠지기 쉬운 치졸하고 좁은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3. 문학사적 의의

이육사는 생을 통틀어 36편의 시만을 남겼지만 그의 시는 청년기 된 이후, 거의 전 생애를 걸친 투옥과 온갖 고문의 와중에서 써내려간 귀중한 유산이다. 이 중 대여섯 편의 시는 윤동주와 함께 일제 말 우리 민족문학기의 공백을 메워준 대표적인 절창이다.

억압된 현실, 민족말살의 참담한 역사적 상황을 비굴하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항거한 투쟁의 삶을 살았고, 대쪽 같은 곧은 의지를 시로 승화시켜낸 시인의 소리이며 구국의 노래였다.

생전에 시인의 시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해방 이듬해인 1949년 10월20일 신석초를 비롯한 문우들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었고 아우인 이원조가 광복이후인 1946년 서울출판사를 통해『육사시집』을 발간한다.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의 낙동강 곁에 그의 시비가 세워진다. 시비에는 자랑스러운 그의 일생과 시 「광야」가 새겨져 있다. 「광야」는 그가 사망한 뒤 동생이 수습한 절명시다.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전문

4. 남겨진 이야기

가. 이육사의 집안 자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가 많기로 유명하며, 그 중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경성 트로이카’로 유명한 이병희와 이효정이 있다.

나. 형제 중 4째인 동생 이원조는 동란 후 좌파문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서 고위직에 임용되기도 했지만 훗날 박헌영과 함께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 속에서도 1955년 정치법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 이육사의 막내인 딸 이옥비여사(1940-)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외삼촌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간 뒤 고문에 못 이겨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거나 다치자, 크게 분노한 이육사가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려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외삼촌 안병철은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으며, 부인 ‘안일양’ 여사도 미안함과 수치심으로 수차례 음독자살을 기도 했으나 시어머니의 위로와 온갖 배려로 모진 시간을 견뎠다고 한다.

라. 잦은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몹시 쇠약해진 이육사는 한학자인 사촌형 이종형이 살던 경북 포항시 남구 청림동에 잠시 휴양 왔는데, 이곳에 있던 60만평 크기의 동양 최대 청포도 농장을 보며 그의 시 ‘청포도’를 창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마. 대구교도소 수감 당시의 수감번호 ‘이육사’는 한자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담았는데

초기에는 한국을 침탈한 일제를 증오하는 의미로 戮(죽일 육) 史(역사 사) 즉 ‘일제의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로 썼는데, 일본경찰의 더욱 심한 탄압을 걱정한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뜻을 순화한 육사陸史로 사용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 일제가 한글 사용을 규제하자 이에 저항해 한시漢詩를 쓰기도 했다. 많은 문인들이 오랜 탄압과 기대할 수 없는 막연함으로 신념을 버리거나 변절하여 친일의 물결에 휩쓸려갈 때도, 조국의 미래를 강건히 지켜낸 민족의 양심이자 광복의 그 날을 향해 끝까지 불태운 그의 신념은 강철 같은 의지였다. 시인임을 떠나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이육사는 진정한 애국자이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실천문학인이다.

바. 그의 형제는 형 이원기와 남동생으로 이원일, 이원조, 이원창, 이원홍이 있었으며 자녀로 이동윤, 이옥비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어려서 세상을 떠난 후 양자로 이동박을 두었다.

그의 묘소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산 4-1에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북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청포도」 전문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불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는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 갔소.

              - 「강 건너간 노래」 전문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라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   「자야곡子夜曲」 전문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2009.09.09.)
  2.  『이육사-투사의 길과 초극의 인간상』 (조창환, 건국대학교 출판부1998)
  3.  『한국현대시대백과』
  4.  『두산백과』

  5.  《이육사 문학관》http://www.264.0r.kr  6.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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