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국 시인의 시인선](3)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1902~1950)
[이희국 시인의 시인선](3)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1902~1950)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5.0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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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1902~1950)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1902~1950)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기념비적인 시인이다. 당시 만연하던 감정과잉의 시를 피해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으며, 자신만의 놀라운 언어감각과 회화적인 수법으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여 문학의 주요 흐름을 격변시켰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비극적 최후를 맞기까지 한국문학의 발전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어 많은 학자들로부터 ‘현대시의 아버지’로 회자되고 있다.

1. 탄생과 성장

1902년 6월20일(음력5월15일) 충북옥천 하계리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아명을 지룡池龍이라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 하였다.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문하여 ‘방지거方濟倨-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부친이 약상을 경영하여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으나 느닷없이 밀어닥친 홍수로 가세가 기울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4년 가까이 산천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겪은 고향의 갖가지 풍습은 감수성 짙은 그의 소년기에 깊이 각인되어 문학에 대한 꿈으로 이어간다. 

당시만 해도 서울유학은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재기를 눈여겨본 가까운 친지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휘문고보 1학년 때 박팔양 등과 함께 ‘요람동인’을 결성해 동인지〈요람〉을 펴내기도 했고 신석우 등과 함께 ‘문우회’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 이일, 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으며 학예부장을 맡는다.

2학년 때《서광》창간호에 소설「3인」을 발표하는 등 날로 문학에 심취하였으며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이태준 등은 훗날까지 그와 가까이 지낸 문우들이다.

2. 삶과 활동 그리고 모던한 감각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3년 4월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에 들어가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문물과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다. 

자신의 빈곤한 처지와 휘문학교 교주 민영휘의 도움을 받는 교비장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식민지배하에 있는 조선유학생이라는 내외적 압박에 시달렸지만 열심히 창작에 매진하였고, 첫 작품인 「카페프린스」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청년들의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26년 유학생회지《학조》창간호에 그는 「카페 프린스」외에도 「슬픈 인상화」, 「파충류 동물」을 비롯해 시조와 동요를 발표하며 다양한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정지용은 근대 풍물과 이국정서를 신선한 감각으로 묘사한 시들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듬해인 1927년 《신민》과 《문예시대》그리고 《조선지광》에 여러 작품을 쏟아낸다. 당시 일본시단을 대표하던 기타하라 하큐슈北原白秋가 주관하던 잡지《근대풍경》에 투고한 시가 호평과 함께 지면을 장식함으로써 일본의 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윌리암 블레이크’에 관한 논문을 내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정작 그가 심취한 것은 인도의 타고르와 자신을 뽑아 준 기타하라의 시詩, 중국의 한시漢詩 같은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시였다. 1928년 첫 아들 정구관이 태어난다.

3. 문학사적 의의

일본에서 귀국한 후 그는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등과 사귀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기초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는지 종종 신경질을 부려 ‘신경통’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시와 소설〉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당시의 문인들은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항복할 때까지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흑기를 살아야 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일제가 서울사람들을 지방으로 ‘강제소개령’을 발표했을 때, 부천으로 내려와 시는 가슴에 묻어둔 채 붓을 꺾고 신앙생활만을 활발히 영위하였다. 

천주교도로서 부천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시인은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물질적 지원을 위해 백방으로 손을 쓰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이화여대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 사회주의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및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滴’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줄곧 순수 지향적 예술세계를 고집하던 시인이 느닷없이 민족문학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단체인 문학가 동맹에 가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선택은 이념에 따른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지만 몇 십 년을 두고 사귄 우의는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그의 말처럼,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진 그가 해방 직전 일종의 의전행위로 미온적으로나마 일제에 협력한 것에 대한 반성과 오랜 지기인 이태준, 이병기등과의 친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1948년 정부수립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이듬해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뒤에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그에 대한 징벌로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여러 강연에 강제로 동원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국제사회의 갈등과 역사적 격동은 민족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자주적으로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급기야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그로 인한 사상 논쟁이 심화되어 한국 문단의 발전과 역사적 흐름이 고립 되고 차단되어 버렸다. 

전란 중에 정지용은 납북되어 1988년 납·월북 작가에 대한 정부 당국의 해금조치가 있기까지 한국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어 버렸다. 

이는 실로 민족의 비극이며 문학의 비극이자 한 인간의 비극이라 할 것이다. 20세기 최고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정지용이 비어 있던 공백은 너무나 아쉬웠다. 

민족 분단으로 인해 문학도 분단되었던 것이다. 2002년 5월 지용의 고향 옥천에서 거행된 ‘정지용 탄생 100주년 문학 포럼’에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정지용의 당대 수용과 비판」에서 지용의 시사적 의미를 20세기 최초의 직업적 전문적 시인이라 평했다. 

이러한 판단은 작품의 성취도나 어느 정도의 작품적 균질감이나 20년에 걸친 지속적인 정진과 관련되지만 무엇보다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열렬히 자각했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탄신 백주년을 맞아 돌이켜 본 문학사적 의미는 그가 한국 현대 시의 아버지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로 성정의 미학을 근거하여 한국의 현대시를 주체적으로 환골탈퇴 시켰다는 것이며, 이상의 시를 『가톨릭 청년』에 소개하고,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였으며, 해방 후 윤동주의 저항시를 《경향신문》에 소개하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상의 서구적 근대감각,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의 전통적 서정의 감각, 그리고 윤동주의 저항 시적 감각 등의 세 가지 시적 감각들이 우리 시문학사에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점에서, 정지용은 가히 한국 현대 시의 결정적 이정표를 만들어준 시인이라 말할 수 있다. 

의미를 논한다면 첫째, 시적 전통의 현대적 혁신이 그것이요, 둘째 서구적 감각과 전통 서정시의 감각을 되살린 문학사적 흐름의 연속성의 확립이며, 마지막으로 윤동주를 부활시킴으로써 식민 치하의 저항시의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정지용 이전에도 김소월과 한용운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들은 정지용만큼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투시하여 독자적인 어휘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지용에 이르러서야 한국어는 현대적 의미의 모국어로서 민족 언어의 완성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동호(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 -정지용의 시 중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전문

4. 영원한 이별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용되었고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시기는 정확치 않고 1953년 북한 평양감옥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1993년 4월 북한에서 발행되는 《통일신보》에는 정지용이 1950년 9월 납북되는 과정에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가. 그의 사인은 납북되던 중 소요산 부근에서 폭격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이 증언은 북한시인 박산윤이 정지용과 함께 납북되던 중 정지용의 최후를 목격했던 소설가 석인해의 이야기를 소개한 회고록을 통해 알려졌다. 

이 증언이 소개되기 전까진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알려져 있었다. 

평양 감옥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계광순 전 의원(1909-1990-4,5,6대 국회의원 역임)의 증언으로 계광순 자신은 9월23일 탈출했지만 정지용은 옥중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나. 2000년 북에 있던 셋째 아들 정구인이 아버지 정지용과 어머니, 그리고 형제를 찾겠다고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해서 찾아온 적이 있었고, 결국 큰형 정구관과 상봉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북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야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다. 과거 해금이 되기 전에는 정지용의 시에 가락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것을 면하고자 가사를 바꾸게 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채동선의‘고향’, 박화목이 개사한 ‘망향’, 이은상이 개사한 ‘그리워’로 알려져 있다.

라. 출생지인 옥천군에서는 매년 정지용을 기념하는 지용제가 개최되고 지용문학상도 진행되고 있다. 옥천역과 일본 동지사대학 교정에 윤동주와 함께 그의 시비가 있다.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이며 일각에서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정지용 시인, 이데올로기의 선전 도구로 삼던 프로 문학이 유행하던 시절 무한한 감각적 참신성으로 시를 예술작품의 반열로 올려놓은 ‘시인 중의 시인’이었다. 

시인은 한국 문학의 100년을 개척하는 새로운 장을 열어 놓고 그리도 허무하게 우리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일본 유학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면서 고향을 그리면서 쓴 시 ‘향수’로 시인을 그려본다.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전설바다에 춤추던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던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향수」 전문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 「유리창1」 전문

 

    얼굴 하나야
    손바닥으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 만 해서
    눈 감을 밖에                             
    -「호수」 전문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2009.09.09. 나무이야기)
    2. 『한국현대시대백과』
    3. 『정지용의 시』(최동호)
    4. 『두산백과』

 글쓴이; 이 희국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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